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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로타리, 3650지구 100년 이야기 (4)
지구관리자 | 24-10-25 | 조회수 155

한국로타리, 3650지구 100년 이야기 (4)

 

초창기 성명 미상의 회원 ‘S. Ryu’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박사였다

한국로타리 97년 만에 처음 발굴한 사료

 

글. 신흥래/지구사료위원장, 서울새신라RC, 소설가

 

 

 

1930년대 경성로타리클럽에서 활동한 한국인 회원 중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채 ‘S. Ryu’라고 전해져오던 인물이 유한양행 설립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유일한(1895~1971) 박사라는 사실이 이번 연재 중 최초로 밝혀졌다.

 

이는 1980년 발간된 《한국로타리 50년사》와 1998년간 《한국로타리 70년사》에서도 그 실명을 알아내지 못한 미완의 사료였으나 한국로타리 100주년을 앞두고 비로소 그 역사적 사실을 규명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S. Ryu가 내 백부님이란 증언 나와

 

《한국로타리 70년사》에 따르면, “1931년 2월에는 43명의 정회원과 1명의 명예회원(조선총독 齊藤實)을, 1934년 8월에는 52명으로 증원되었다. 이 중에 김연수, 박영철, 방태영, 민대식 제씨가 가입되었다고 하며, 유억겸, 박흥식도 이때 가입한 것으로 전해지고 이외에도 S. Ryu라는 회원의 기록이 있는데 한국명은 알려지지 않았다.”(73쪽)라고 기술하고 있다.

 

필자 역시 ‘그 인물이 국내에 체류하던 재미교포가 아니었을까’라고 추측할 뿐 그 이상의 사실을 추적할 방도가 없었다. 그러던 중 《로타리 서울》 3회분 연재기사를 본 유승흠(서울무악로타리클럽 회원) 한국의료지원재단 이사장이 “그분이 내 백부님(유일한)”이라는 사실을 증언해줌으로써 97년 동안 묻혀 있던 진실을 밝히는 단초를 제공해주었다.

 

유 이사장은 서울무악로타리클럽 창립회원으로서 지금까지 활동 중이다. 연세대 의대(의학박사)와 미국 존스홉킨스보건대학원(보건학박사)을 졸업하고 연세대 교수와 세브란스병원 부원장, 보건대학원장, 대한민국의학한림원 회장, 학교법인 유한학원 이사장 등을 지냈고, 현재 한국의료지원재단 이사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유 이사장은 유일한 박사의 넷째 동생(동한)의 장남으로 유 박사의 조카이다.

 

유 이사장은 “백부님과 부친은 24살 터울의 띠동갑(말띠)이시라 백부님께서는 아들처럼 대해주셨고, 저는 조카이지만 손자처럼 귀여워해주셨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큰아버지는 조카(유승흠)가 의과대학에 진학하자 당시 머물던 반도호텔로 불러 아침을 함께하며 축하했다. 그리고 유한양행 주식 500주(당시 액면가 500원)를 주면서 이 주식으로 “엿 사먹지 말라.”고 평안도 말투로 다짐을 받기도 했고, 1967년 미국의 큰어머니(胡美里, 미국명 Mary Woo, 1896~1981)가 한국을 방문할 때 청진기를 사오게 하여 이를 선물할 만큼 자상하게 아껴주셨다고 회상했다.

 

또한, 큰아버지가 별세하기 4~5년 전쯤 세브란스병원에 다섯 차례 입원했는데, 그 당시 연세대 의과대학에 다니던 유 이사장이 병실에 들러 대화할 기회가 있어 큰아버지가 살면서 겪었던 일화들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알게 되었다. 유 이사장은 2018년에 큰아버지에 대한 자료들을 한데 모아 《유일한 정신의 행로》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지난 3월 14일, 유승흠 이사장의 한국의료지원재단 집무실을 방문해 구체적인 증언을 들었다. 다음은 이날 나눈 이야기와 《유일한 정신의 행로》의 내용, 신문 자료 등을 간추려 정리한 것이다.

 

 

부친 유기연의 삶과 시대적 배경

 

아버지(유기연, 1861~1934)는 본래 경북 예천 출신이나 청일전쟁의 화마를 피하는 동시에 농촌의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신문물이 활발하게 유통되던 도시를 찾아 평양에 정착했고, 비단을 팔며 재봉틀(싱어 미싱) 상점까지 운영해 젊은 나이에 부를 일구었다. 또한, 평양은 미국 선교사들이 활발히 활동하던 곳이라 교육과 의료, 종교, 신문물 등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는 여기서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한 미국인 선교사 사무엘 마펫(한국명 마포삼열)에게 가르침을 받고 독실한 신자가 됐다. 스스로 상투를 자를 만큼 개화된 인물로서 애국심이 남달라 일찍이 항일운동 서북지역 재정책임자로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에는 일경의 감시가 심해지자 가족들과 함께 중국 연길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냉면 가게를 열었다. 냉면 장사가 생계를 위한 방편이기도 했으나 손님이 붐비는 식당에서 은밀하게 독립자금을 주고받기 위해 그가 궁리한 방책 중 하나였다.

 

유기연은 이렇듯 기독교 영향으로 개화되었고 독립에 대한 신념이 뚜렷하여 연길에 정착한 이듬해 번화가(연길 국자가)에 교회를 세웠고, 1912년 한인 학생들이 공부할 길신여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렇게 선각자적인 삶을 살았기에 그는 큰아들이 미국에서 신학문을 익혀 한민족을 위해 기여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어린 아들을 미국행 배에 태워 보냈다. 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을 외국에 많이 보내 신교육을 시켜야 나라가 빨리 개화되고, 그럼으로써 나라가 온전히 설 수가 있다.”는 개화입국론에 따라 슬하의 6남3녀 모두를 여학교와 외국 학교에 보내 공부하도록 했다.

 

 

<유학을 떠나던 시기의 소년 유일한과 노년의 유일한 박사.(사진제공: 유승흠)>

 

 

소년 유일한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

 

우리가 궁금해하는 ‘S. Ryu’가 유일한이라는 사실을 규명하기에 앞서 먼저 그의 이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는 진주 류씨(柳氏) 재신공파(宰臣公派) 27세손으로 본래 이름은 ‘유일형(柳一馨)’이다. ‘형’ 자가 항렬 상 돌림자다. 그러나 평양 사람들이 ‘류’를 ‘누’라 하고 ‘형’을 ‘행’이라 발음하기에 ‘누일행’, 또는 ‘일행’이라고 불렸다.

 

유일한은 1895년(음력 1894년 12월생) 평양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인 1904년 마펫 선교사가 주선해 미국에 유학하게 되었다. 그해 가을, 아버지와 인솔자 박장현 순회공사, 그리고 유학생 이종예, 이태산(이승만의 아들, 도미 후 1907년 病死)과 함께 미국으로 가기 위해 평양에서 노량진까지 닷새 동안 걸었다. 그런 다음 경인선 열차로 제물포에 도착, 여러 달을 기다렸다가 1905년 8월 24일 태평양을 횡단하는 미국 여객선 S.S Korea호를 타고 후쿠오카, 홍콩과 상해, 호놀룰루를 거쳐 한 달 엿새 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이때 승선자 명단에 소년 이름은 ‘Il-hung Yeu’라고 기록되어 있다.(위의 책, 29쪽)

 

이어서 소년은 로스앤젤레스와 덴버를 거쳐 네브래스카주 커니(Kearney) 시로 옮겨 침례교 신자의 집에 기숙하며 농장 일로 약간의 생활비를 벌었다. 이 시기에는 커니시티스쿨에 다녔는데, 학생부에는 ‘Il-han Lu’로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미국인들이 ‘일행 루’라는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데다가 ‘I'll hang you’처럼 들린다고 놀려대는 일도 있었다. 이에 소년은 ‘형’을 ‘한(韓)’으로 바꿔 한국인이란 정체성과 애국의 의미를 담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양의 아버지에게 이름을 ‘일한(一韓)’으로 개명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 허락을 얻었다. 아들 생각을 대견하게 여긴 아버지는 동생들 이름까지 ‘한’으로 바꾸고 이후에 태어난 형제자매 모두 ‘한’ 자 돌림으로 이름을 지었다.

 

또, 소년은 미국인들이 ‘류(Ryu)’를 제대로 소리내지 못하니 평양 사람들처럼 ‘누’로 읽도록 ‘New’로 표기함으로써 ‘Ilhan New’라는 영문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헤이팅스 고등학교 연보에는 ‘I. H. New’로 쓰여 있다. 1925년, 미시간대학을 마치고 중국계 미국인인 호미리와 결혼해 미국 시민권자가 되어서도 그 이름을 계속 사용하였다.

 

 

<1924년 11월 27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유일한 사진과 동정 기사.(출처: 조선일보)>

 

1926년 귀국, 유한양행 창립 이후의 영문 이름

 

유일한은 지인을 통해 1926년 12월 경성부 종로2정목(지금의 종로2가)에 유한양행을 창업했다. 그리고 1927년 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여객선을 타고 달포 만에 귀국해 서재필 등 독립운동가와 사업가, 외국 인사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의 기업 목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겨레와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사명에 양행(洋行)을 붙인 이유는 현대와 같은 ‘종합상사’의 의미를 담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의약품은 물론 비누, 캔디, 양과류, 소맥분, 페인트, 의사용 및 가정용 고무장갑, 보건용품, 석유난로 등등 국민생활에 유익한 것이면 무엇이든 수입했고, 화문석과 자개, 개성인삼 등 우리나라 특산품을 수출했다. 그리고 해외를 직접 돌면서 중국, 타이완, 일본, 만주 등 아시아 지역에 12개 지점과 주재소를 설치했다.

 

그는 1930년대 중반 경성로타리클럽에 가입해 1938년 일제의 미국인 축출 압박으로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로타리 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경성로타리에 7명의 한국인 회원(김연수, 민대식, 박영철, 박흥식, 방태영, 유억겸)이 입회한 1934년부터 1938년까지 5년간 회원으로 활동했을 것이다.

 

다만, 이때 유일한이 회원명으로 사용한 ‘S. Ryu’라는 이름에서 이니셜 ‘S’는 어떤 의미로 쓴 약자였을까가 의문으로 남는다. 유승흠 이사장은 “첫 이름자 ‘S’는 당시 사시던 동네가 신문로2가 7번지였는데, 신문로의 ‘S’를 이니셜로 쓰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시간대학교 학적부에 있는 유일한의 자필 이름>

 

<연세대 명예박사학위 수여식 당시의 유 박사. 맨 왼쪽이 유승흠, 오른쪽이 유순한(여동생)이다.>

 

즉, 그 시대 사람들이 자신을 소개할 때 겸양의 뜻으로 ‘어디 사는 아무개’라고 말하던 관습이 있었는데, ‘신문로에 사는 류씨’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사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근대에는 문인이나 지식인, 신문기자들이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필명이나 가명을 쓰던 문화가 일반적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미국서 쓰던 영문 이름(Ilhan New) 대신 왜 약식 이름을 사용했을까? 즉, 미국 시민권자(부인 호미리가 시민권자)였던 그가 미국식 풀 네임을 쓰지 않고 우리말 이름을 빼고 성씨(류)만 간략하게 쓴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 상황이다. 그는 조국 독립에 대한 열의가 남달랐다. 미국 유학 초기에 박용만이 세운 한인소년병학교에 다녔고, 중고교 때는 물론 대학시절에도 미국 내 독립운동 관련 행사에 적극 참여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독립운동가 서재필이 소집한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서는 대의원으로 참여했고, 결의문 작성 기초위원을 맡아 ‘한국민의 목적과 열망’이라는 결의문을 작성, 낭독했다.

 

그러므로 일제 치하에서 기업을 경영하며 자신의 신분을 최대한 노출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물론 일본 경찰들이 이미 유일한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귀국할 때도 나가사키서부터 고등계 형사가 그의 뒤를 밟았고, 경성역에 내리자마자 경성세관에서 일경의 조사를 받을 만큼 이미 요시찰 인물이었던 것이다.

 

혹시나 확증편향의 오류를 경계하는 차원에서 다른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그 당시 ‘Ryu’라는 영문 성을 가진 기업가가 ‘유일한’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자료는 신문 기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유한양행을 설립하기 2년 전 잠시 귀국해 조선일보와 영어로 인터뷰한 기사(1924. 11. 27)를 보면, “고단한 조선 사람으로 멀리 태평양 건너 미국에 가서 유수한 실업가가 된 사람,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면서 “아메리카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시에서 ‘조선 숙주나물 만드는 회사(라초이 식품회사-필자 주)’를 설립하여 성공하고 고향에 있는 자기 부모를 찾아보러 조선에 온 유일한 씨는 실로 해외에 나가 성공한 조선 실업가 중의 하나이다.”(위의 책, 124쪽)라고 소개하고 있다.

 

1927년 귀국 직후 동아일보(1927. 3. 27)에 실린 기사에서는 그의 미국 유학과 라초이 회사 동정을 소개하며 “전 미국에서 ‘라초이’ 회사 유일한이라면 모를 사람이 없을 만큼 그 회사와 씨(氏)의 명성은 자자하다고 한다.”면서 “며칠 전 씨는 메리 부인과 한가지로 귀국하여 방금 시내 인사동 태화여학교(지금의 성신여대 전신-필자 주) 교장 사택에 유숙하는바 왕방(往訪)한 기자를 반가이 맞으며 ‘부끄러운 일이나 우리말을 잘 못함을 용서하시오.’ 하고는 쾌활한 태도로 다음과 같이 말하더라…” 하고 그의 근황을 소개하고 있다.

 

이밖에도 조선, 동아 등 일간지에서는 수시로 그의 동정을 다뤘는데, 이와 같은 객관적 자료를 근거로 추적해볼 때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말까지 재미교포 또는 미국 시민권자로서 국내에서 ‘Ryu’ 씨로 활동한 사람은 ‘유일한’ 한 사람밖에 없었다고 단정해도 아무런 무리가 없다.

 

아울러 유일한이 미국에 있으면서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1926년 유한양행을 세웠는데, 그 일을 도왔던 백상규(당시 보성전문 교수)가 경성로타리클럽의 한국인 창립회원 4명 중 한 사람이었다. 또 백상규는 유일한보다 두 살 위였으나 미국 브라운대에서 공부한 유학파였으므로 두 사람은 무척 가까운 사이였을 것이며, 경성의 하나뿐인 로타리클럽에 가입하는 데 일조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청부와 청빈 모두를 이룬 유일한의 삶

 

그는 1932년 신문로2가 6번지에 사옥을 신축했다. 그리고 수입약품 도매상에 그치지 않고 직접 약품 제조에 나섰다. 오늘날에도 판매되고 있는 소염진통제 ‘안티프라민’은 1933년부터 발매된 제품이다.

 

유한양행은 유럽 제약사들과 기술제휴를 하는 한편, 부천 소사에 공장을 세우며 사세를 확장해갔다. 그리고 회사를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사상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도입하는 등 ‘유일한 정신’을 구현해 나갔으나 일제가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면서 국내에 있는 미국인들을 축출함에 따라 그는 1938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이 시기에 남캘리포니아대 대학원에서 MBA(경영학석사)를 하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나성한인경위대(일명 맹호군)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2차대전 중에는 미국 육군 전략정보국(OSS)에서 한국 정보담당자로 활약했다.

 

조국 독립에 기여하려는 그의 애국정신은 미국의 한반도 침투작전 ‘냅코(NAPKO) 프로젝트’에서 절정을 이룬다. CIA 전신인 OSS가 비밀리에 추진한 냅코 프로젝트에서 그는 암호명 ‘A’로 불렸으며 총 6개조 중 제1조 조장에 임명되었다. 그의 나이 50세에 로스앤젤레스 연안의 카타리나 섬에서 약 4개월간 유격과 낙하훈련, 폭파훈련 등을 받았으나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항복함으로써 이 작전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은 군사작전의 기밀을 지키기 위해 유 박사가 살아생전 이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아 아무도 알지 못했다가 그의 사후에 기밀유지기한 30년이 지남으로써 비로소 그의 활약상이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유승흠 이사장은 초등학교나 중학생 시절 큰아버지를 뵈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라든가 ‘이웃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들려주셨다고 회상했다.

 

 

<지난 3월 14일, 유일한 박사에 관해 이야기하는 유승흠 이사장>

 

 

-진실한가? -모두에게 공평한가?

-선의와 우정을 더하게 하는가? -모두에게 유익한가?

 

이는 로타리안들이 생각과 말과 행동의 지표로 삼고 있는 ‘네 가지 표준(Four Way Test)’이다. 공교롭게도 ‘네 가지 표준’이 채택된 것은 1933-34회기였다. 유일한이 경성로타리클럽에 입회한 즈음 그는 이를 낭송하며 로타리 가치에 감동했을 것이고 이를 가슴에 새겼을 것이다.

 

그의 로타리 활동은 시대 상황에 따라 중단되고 말았으나 그는 일생을 통해 로타리 가치를 실천헸고, 기업을 하여 이룩한 부를 사회와 교육을 위해 전액 기부함으로써 존경받는 기업가로 남았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청빈(淸貧)의 정신도 훌륭하지만,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룬 청부(淸富)라는 가치 또한 위대하다. 유일한 박사는 청부와 청빈 모두를 실천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시대를 뛰어넘어 존경받고 있다. 우리는 이같이 위대한 인물이 한국로타리와 함께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긍지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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