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3650 지구소개

Rotary International District 3650

826
한국로타리, 3650지구 100년 이야기 (2)
지구관리자 | 24-10-25 | 조회수 61

한국로타리, 3650지구 100년 이야기 (2)

 

일본과 한국 로타리의 해체와 태평양전쟁 발발

‘경성 수요회’로 맥을 잇다가 1949년 재건

 

글. 신흥래

지구사료위원장, 서울새신라RC, 소설가

 

 

서울 부민관서 처음 열린 70지구 제8회 연차대회

 

제70지역 연차(지구)대회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간다. 1938년 5월 14~15일(토~일요일) 양일간에 걸쳐 제8차 연차대회가 서울(경성)에서 449명의 회원과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참가자 중에는 국내 회원뿐만 아니라 일본과 만주 등 해외에서 온 회원들도 있었으므로 실제로는 소규모 국제대회와 같은 성격을 띠었다. 일본과 만주 회원들 대부분은 대회 2~3일 전 경성에 도착하여 반도호텔과 조선호텔 등지에 묵었으며, 대회 이후에는 인천과 평양, 벽제관, 금강산, 불국사 등 명승지를 찾아 관광했다.(한국로타리 70년사 참조)

 

대회 첫날, 사토미시(里見) 총재 주재로 조선호텔에서 클럽 회장과 총무 등 임원들의 전야간담회가 있었고, 이튿날 오전 9시부터 경성 부민관에서 본대회가 열렸다. RI회장대리로는 아사부키 츠네키치(朝吹常吉, 미쓰코시 사장)가 참석했다. 로타리안과 가족들은 연차대회를 마친 후 덕수궁과 창덕궁 인정전, 비원 등을 견학했다.

 

대회가 열렸던 부민관(府民館)은 경성 부민(시민)들을 위한 부립회관이었다. 지금은 낯선 이름이지만 현재 서울시의회 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 바로 옛 부민관이다. 이 건물은 6.25 이후 국회의사당으로도 쓰였고, 국회가 여의도로 이전한 뒤 일부 개축하여 1970년대에는 시민회관으로 사용되다가 세종문화회관이 세워진 뒤 그 별관으로 운영된 바 있었다.

 

부민관은 대강당과 중강당, 소강당, 집회실 및 담화실, 식당 등을 갖춘 지하1층, 지상3층 규모였다. 당시 경성부회 이승우 의원이 서울의 전차운영권을 갖게 돼 막대한 이득을 보장받은 경성전기주식회사(京電) 측에 기부금을 내도록 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회관건립을 추진했다는 뒷이야기가 전해진다.

 

연차대회가 경성에서 처음 열리게 된 것은 경성로타리에 이어서 부산과 평양로타리가 창립되면서 로타리가 확산되고 있던 분위기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대회 직후인 5월 18일에는 대구로타리클럽이 창립되었다.(회원 29명 중 한국인 5명) 이로써 국내 로타리클럽은 4개 클럽에 14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국내 첫 지구대회가 열렸던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오른쪽에 경성일보 사옥이 보인다.(사진·서울역사박물관)>

 

 

일본로타리 해체 선언, 태평양전쟁의 먹구름 몰려와

 

1939년 7월, 국제로타리 제70지구는 3개 지구(70~72)로 분할되었다. 나고야 및 도쿄를 비롯한 동일본 지역의 20개 클럽이 제70지구로, 서일본과 타이완(대만)의 19개 클럽이 제71지구로 분구됐다. 그리고 우리나라(경성, 부산, 대구, 평양 로타리) 4개 클럽과 만주의 3개 클럽 등 7개 클럽은 제72지구가 되었고, 대련(大連)로타리 소속 카이세 킨고(貝瀨謹吾)가 제72지구 초대 총재에 취임하였다.

 

카이세 킨고(1878~ ? )는 쿄토대 출신으로 대련철도사무소장, 대련시회 부의장(선출직)을 지냈고, 1931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퇴임한 뒤에는 동양탄광과 남만주가스, 대련기선 등의 이사로 활동했다.

 

지구 분구와 함께 일만(日滿)로타리 연합회가 결성되었는데, 요네야마 우메키치가 초대 연합회장을 맡았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우리나라가 독자적으로 한국로타리 연합회를 출범하게 된 것은 1959년에 이르러서였다. 서울로타리클럽을 비롯 부산, 대구, 한양, 인천, 남서울, 대전, 전주, 남부산, 광주로타리클럽 등 10개 클럽이 2월 23일 서울 반도호텔에서 창립총회를 가졌고, 서울로타리의 김동성(金東成, 합동통신 사장)이 초대 연합회장에 선임된 바 있었다. 그로부터 2년 뒤 1961년 7월 1일, 우리나라는 모두가 염원하던 독립 지구(375지구 : Republic of Korea)로 승격함으로써 중흥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야기를 다시 1940년대로 돌린다. 총 3개 지구로 분구할 만큼 우리나라와 일본, 대만 등지에서 로타리가 활성화되고 있었으나 일본로타리가 돌연 해체 선언을 함으로써 동북아시아 로타리가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 시발점이 된 것은 1940년 8월 요네야마 우메키치의 고향인 시즈오카(靜岡)로타리클럽의 해산 선언이었다. 그리고 12월, 일본로타리가 전격 해체를 선언하고 국제로타리에서 탈퇴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태의 본질은 일본이 본격적인 전시체제로 돌입한 것에 있었다. 결국 로타리 해체란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독일 나치정권도 이미 1937년 40여 개 로타리클럽을 강제 해산한 바 있었다. 그러고 나서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 올랐던 것이다.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기습 감행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국민들이 원하던 그렇지 않던 일본과 그 식민국가들은 전시체제로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인도주의와 평화를 지향하는 로타리 역시 시대적 불행에 빠져들었다.

 

 

경성 수요회로 명맥 잇다가 1949년 국제로타리에 재가입

 

경성로타리클럽 해체 당시의 임원진은 다음과 같다.(조선일보, 1940. 7. 4)

 

회장: 와다 야치호(和田八千穗)

부회장: 오카자키 코우이치(岡崎康一)

이사: 하야시 시게초(林繁藏), 민규식(閔奎植), 다테 요츠오(伊連四雄), 스즈키 분지로(鈴木文次郞)

간사: 무샤 렌조(武者鍊三)

 

회장 와다 야치호는 의학박사로 명동 소재의 한성병원장이었고, 의료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고종황제로부터 훈장을 서훈한 바 있는 인물이다.

 

클럽 이사였던 하야시 시게초는 일본식산은행장, 민규식(1888~ ? )은 휘문학원 설립자 민영휘의 3남으로서 당시 동일은행 회장이었다. 그는 영국 캠브리지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1943년 조흥은행 회장, 1946년 조선은행 총재 등을 역임했으나 1950년 7월 납북되었다. 다테 요츠오는 도쿄제국대 법학부 출신으로 총독부 관료를 거쳐 경북도지사와 경성부윤을 지낸 인사다. 스즈키 분지로는 경성 조지야(丁子屋) 백화점 사장으로서 경성상공연합회 상임간사였다. 예전의 미도파백화점(현 롯데영플라자)이 당시 조지야 백화점이 있던 자리다. 간사(총무) 무샤 렌조(武者鍊三)는 경성전기 전무이사로 재임중이었다.

 

회원이 90여 명까지 늘어날 만큼 성장하던 경성로타리는 1940년 12월 31일부로 해체되었고, 국제로타리는 1941년 2월 14일자로 등록을 취소했다.

 

하지만 클럽 해체 이후 회원들은 클럽 명칭을 ‘경성 수요회’로 변경하고 경성로타리의 명맥을 계속 이어갔다. 로타리클럽이란 이름으로 활동할 수 없었다 할지라도 그 맥을 이어갔다는 점은 큰 의의가 있었다, 즉, ‘경성 수요회’가 있었으므로 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3월 29일, 그 역사를 계승한 서울로타리클럽을 재건하는 데 초석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국제로타리 재가입에는 회원이던 조지 피치(George A. Fitch, YMCA 총무)와 이태환(李泰煥, 경성전기 사장)이 주도적으로 실무를 추진했다.(한국로타리 50년사)

 

이태환(1904~1978)은 한국전력 전신인 경성전기 초대 사장으로 재임했고 대한소년단(스카우트연맹) 초대 간사장을 맡아 한국에 스카우트를 도입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유년시절이던 1911년, 105인 사건으로 미국으로 망명한 부친(이용혁)을 따라 도미해 퍼듀공대를 졸업했다. 그는 1961년 우리나라가 독립지구(375지구)로 승격했을 때 초대 총재로 선출되었다.

 

 

<서울로타리클럽 재건의 산파역이었던 이태환. 375지구 초대 총재를 지냈다.>

 

 

시대 애환이 스며 있는 경성로타리클럽 초기 활동

 

지난 호에서 얘기했듯이 경성로타리는 매주 주회를 열지 못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나라 두 번째 클럽인 부산로타리클럽 창립 과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부산로타리클럽가 창립된 것은 1935년 3월 7일이다. 우리나라로서는 경성로타리 이후 8년 만에 두 번째 클럽이 탄생한 것이었는데, 그 스폰서클럽이 경성로타리였다.

 

이때 스페셜 커미셔너가 경성로타리 회원 코야마 타다야키(小山忠秋, 오사카상선 부산지점장)였고, 제70지구 총재는 무라타 쇼조우(村田省藏, 오사카상선 사장)였다. 당시 무라타 쇼조우(1878~1959) 총재는 훗날 2차대전 중 일본 도조 내각의 체신상 겸 철도상(1940~41년)을 지내기도 했다.

 

<부산로타리클럽 창립 당시의 제70지구 총재 무라타 쇼조우.>

 

오사카상선 임원인 코야마는 같은 회사 사장으로 있던 무라타 총재와 함께 부산을 방문하여 지역 상공인 10여 명을 초대한 자리에서 로타리클럽 창립을 권유했고, 코야마는 경성로타리클럽 제33차 주회에서 이같은 사실을 보고했다는 기록이 있다.(한국로타리 50년사)

 

즉, 제33차 주회가 1934년 6월 6일 수요일에 열렸으므로 창립일인 1927년 8월 27일을 기점으로 보면 무려 6년 10개월 만에 33차 주회가 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월 정기회합을 가졌다 하더라도 이미 80회가 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정을 감안해볼 때 2~3개월에 한 번 정도 부정기적으로 모였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경성로타리 주회 장소였던 경성역 2층 그릴 레스토랑.(사진·문화역서울284)>

 

이러한 현상은 도쿄로타리클럽의 초창기 실정과 비슷했다. 또, 당시 국내 하나뿐인 경성로타리클럽은 회원이 전국에 산재해 있었으므로 매주 정기회합이 여의치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볼 때 부정기적인 회합이라고 하더라도 일정하게 수요일 12시 15분 경성역 그릴 레스토랑에서 모였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초창기 봉사활동으로는 수재의연금(1937년 등), 수해동정금 87원(1938년), 한재(旱災)구제금 1천원(1939년) 등을 신문사나 조선사회사업협회를 통해 기부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마도 클럽 연륜이 짧고 당시 실정이 재해 현장을 직접 찾아가는 봉사활동이 어려웠던 사회적 여건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당시 성금 중에 회원 일동 명의로 국방헌금 800원(1937년), 전투비행기 기부성금 등을 기부한 기록이 있다.(조선일보, 동아일보) 일제의 직간접적인 강압으로 너나없이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겠으나 로타리가 군비 성금을 냈다는 사실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비록 시대적 애환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로타리안으로서 전비를 후원했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역사라고 할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은 일제의 마각은 사회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었던 터였다. 1939년 경성 연차대회에서도 본대회 개막 전 참석자들이 남산 신사를 찾아가 공동으로 참배해야 하였다.

 

이밖에 주회 때는 외부 연사의 강연이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동아일보) 1935년 기록에 의하면, “수당 김연수(秀堂 金䄵洙) 선생이 경성로타리 주회 의장으로서 사회를 맡았으며, 그 주회의 연사로 외솔 최현배 선생이 한글에 관한 연설을 했다”고 나와 있다. 김연수(1896~1979)는 경성로타리 창립회원인 인촌 김성수의 아우로서 경성방적 사장을 지냈고 삼양사를 창업한 인물이다. 이 기사에 ‘주회 의장’이라고 한 것은 당시에 사찰이 주회의 사회를 보았던 관례로 보아 로타리 직책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언론에서 ‘사찰’이란 직책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아울러 ‘한글’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는 사실은 대다수 일본인 회원들이 우리의 언어와 문화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를 견지하지 않았다는 점을 유추해볼 수 있다. 또한 이때까지만 해도 총독부가 유화적인 문화정책을 펼치던 시대라서 그런 사회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호에 계속]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