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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로타리, 3650지구 100년 이야기 (1)
지구관리자 | 24-10-25 | 조회수 163

한국로타리, 3650지구 100년 이야기 (1)

 

서양선교사 통해 1922년부터 국내에 로타리 전파,

암흑시대에도 인도주의와 봉사의 싹이 움트다

 

신흥래/서울새신라RC·지구사료위원장·소설가

 

 

경성로타리구락부 탄생 전후, 그리고 1920년대 세계 로타리

 

경성로타리클럽은 우리나라 로타리의 뿌리다. 미국 시카고에서 로타리가 창설된 지 12년 만에 우리나라에도 첫 번째 로타리클럽이 태동했던 것이다.

 

1927년 8월 27일 토요일이었다. 유난히 폭염이 심했던 그해 여름의 끝자락에 21명의 회원이 모여 창립총회를 열었고, 11월 10일 한국의 첫 번째 로타리클럽으로서 국제로타리의 인증을 받았다.(등록번호 2703호)

 

이때는 마침 근대화 물결을 타고 국제간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로타리 가치에 공감하는 인사들에 의해 로타리가 각 나라로 퍼져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 해만 해도 우리를 포함해 파라과이,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볼리비아, 독일, 자바, 파키스탄 등지에서 로타리클럽이 새로 탄생했다.

 

그리하여 1927년 즈음의 국제로타리는 45개 국가에 63개 지구로 나뉘어 있었고 2,628개 클럽, 40,321명의 회원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1938년 5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국제로타리는 44개국, 2,933개 클럽에 회원수가 11만 명을 넘은 것으로 나와 있었다. 그리고 경성로타리클럽 역시 회원수가 87명으로 네 배 이상 늘어나 있었다.

 

창립 당시 명칭은 ‘경성로타리구락부’였다. 시대적으로 일제 치하였던 터라 영문으로는 ‘The Rotary Club of Keijo, Chosen’이라고 등록되었다. 경성(京城 : 서울의 옛 이름)을 일본어로 ‘게이죠(Keijo)’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또, 명칭에 구락부(俱樂部)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이는 클럽(크라브)의 일본식 음역 표기에서 기인한 단어로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대형 식당의 상호나 동호회 이름 등에 사용되던 바 있었다. 즉, 경성로타리클럽의 일본식 표기였던 셈이다.

 

그리고 잃었던 나라를 되찾은 이후, 경성로타리클럽은 1949년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The Rotary Club of Seoul, Korea’, 즉 ‘서울로타리클럽’이라는 명칭으로 국제로타리에 재가입 신청서를 보내 승인을 받았다.

 

 

일본 로타리 창시자인 요네야마와 도쿄로타리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로타리를 처음 도입하려던 이는 미국인 선교사들이었다고 한다.(한국로타리 70년사 참조)

 

당시 서울 남감리교의 첫 감독으로 부임한 보아즈(H. R. Boaz)가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로타리클럽 총무 빌리 허튼(Billy Haughton)을 통해 국제로타리 사무총장 체슬리 페리(Chesley R. Perry)에게 한국에서의 클럽 창립에 관해 문의한 것이 발단이었다.(1922. 12. 11일자, 편지 기록)

 

하지만 선교사의 후원에 따른 클럽 창립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일본 경제인들이 당시 총독 사이토 미노루(齊藤實)의 지지에 힘입어 미국 선교사를 배척하고 독자적으로 클럽을 만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여기에 일본 로타리의 창시자이자 도쿄로타리클럽 초대회장을 지낸 요네야마 메키치(米山梅吉, 1868~1946)가 등장한다. 그는 1918년 미국 댈러스 출장 중에 당시 댈러스로타리 회원이던 후쿠시마 기소지(福島喜三次, 1881~1946)로부터 로타리 운동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귀국, 1920년 24명을 규합해 도쿄로타리구락부를 창립했던 것이다.

 

<2019년 발간된 평전 표지의 요네야마 우메키치.>

 

후쿠시마는 미쓰이물산 자회사인 동양면화 사장으로서 댈러스에 체류 중이었는데, 현지 클럽에 입회함으로써 일본인 최초의 로타리 회원이란 기록을 보유하게 됐다.

 

이후 일본 로타리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네야마는 1926-27년 회기에 RI 이사에 선임되었고, 1928-29년 일본과 조선, 만주국을 묶어 제70지구가 설정되었을 때는 초대 총재를 맡아 3년간 재임했다.

 

이렇듯 일본 로타리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그는 일찍이 미국의 오하이오와 뉴욕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귀국하여 오늘날 미쓰이(三井)은행의 전신인 미쓰이신탁회사를 창립한 인물이다.

 

우리에게는 일본에 유학하는 외국 학생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주는 ‘로타리 요네야마 기념 장학회’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 바로 그다. 이 장학회는 그의 사후에 도쿄로타리클럽 발의로 발족됐는데 출범 5년 만에 전국 로타리클럽 연합사업으로 발전돼 민간 최대규모의 장학재단으로 우뚝 서게 됐다. 그의 고향 시즈오카에는 기념관까지 세워져 있을 만큼 그는 존경받는 로타리안이다.

 

이와 같이 경성로타리 창립 배경에는 도쿄로타리의 마쓰오카 마사오(松岡正男), 이사카 타케오(井板孝, 훗날 제70지구 제2대 총재) 스페셜 커미셔너(현 총재특별대표)가 서울에 있는 일본 경제인들에게 창립을 권유했고, 오사카로타리의 히라오 하치사부로(平生釟三郞, 1936~37년 내각 문부대신 역임) 총재특별대표도 실무를 도왔다. 아울러 이러한 모든 과정에 요네야마 우메키치 RI이사도 많은 역할을 맡았을 것으로 본다.

 

 

한국인 4명 포함 21명으로 창립, 경성역 2층서 회합

 

이렇게 하여 경성로타리클럽은 일본 도쿄로타리클럽을 스폰서 클럽으로 하여1927년 7월 1일 발기인 모임을 거쳐 8월 27일 한국인 4명과 일본인 17명 등 총 21명의 회원을 중심으로 창립총회를 가졌으며, 초대회장에 조선철도주식회사 상무취체역이던 닛타 류지로(新田留次郞)를 선임했다. 닛타 회장은 1918년 총독부 철도국 공무과장으로 부임한 이래 조선철도주식회사의 상무와 전무, 조선철도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인사다.

 

우리나라 창립회원으로는 김성수(경성방직주식회사 사장, 중앙고보 설립자), 한상룡(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 사장), 김용주(서울프레스 주필), 백상규(보성전문 교수) 등 4명이 참여했다. 한국인 최초 로타리안이었던 이들의 면면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상룡(韓相龍, 1880~ ? )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영어교사를 하다가 한성수협조합 평의원, 한성은행 전무, 동양척식회사 이사,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바 있다. 특히 그는 우리나라 실업가들의 자본을 모아 1921년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를, 이듬해에 조선화재보험주식회사를 설립해 우리 자본에 의한 토착 보험사를 설립한 인물이다.

 

김용주(金用柱, 1888? ~1937)는 그의 선친(金潤晶)이 주미 한국공사관에 재직한 관계로 일찍이 미국에서 자랐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과 콜로라도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미국 언론과 기업에 재직한 바 있어 영어에 능통했다. 그의 선친은 인천부윤, 충북도지사, 중추원 참의 등을 지냈다. 1922년 귀국한 그는 서울프레스 주필로 재직했고, 경성클럽 창립 때부터 사찰로 활동하면서 주로 주회를 이끌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성일보 기사에 실린 언론인 김용주 사진.(1937)>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시절의 백상규. (사진 네이버)>

 

서울프레스는 총독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에 통합되어 국내 유일의 영자지로 발행되었다. 국내에서 활동기간이 짧아 그에 관한 자세한 이력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1937년 급성뇌막염으로 입원했다가 50세를 일기로 갑자기 사망한 것으로 보도되었다.(경성일보, 1937. 4. 7) 경성일보는 한성신보와 대동신보를 통합해 통감부에서 발행하던 기관지였다가 경술국치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바뀐 신문이었다.

 

백상규(白象圭, 1881~1955)는 유일한(柳一韓)이 우리나라 최초의 양약회사 유한양행을 창업할 당시 윤영선, 예동식 등과 같이 그를 도왔던 인물이다. 미국 브라운대를 졸업한 후에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 교수로 부임해 영문학과 경제학을 가르쳤다. 일설에 의하면 1923년부터 오늘날 고려대의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는 응원구호 ‘입실렌티’가 그의 작품이라고 전한다.

 

광복 이후 여운형, 김규식 등과 같이 건국운동에 참여했고, 훗날 정부 수립 직전에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를 지냈다. 1950년, 그의 고향인 경기도 장단군에서 제2대 국회의원(무소속)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6.25 전쟁 때 납북되고 말았다.

 

경성로타리 입회 당시 36세였던 김성수(金性洙, 1891~1955)는 기업인이자 교육가였고, 동아일보를 창간한 언론인으로서 왕성하게 활약했다. 경성방직 사장과 동아일보 사장, 그리고 중앙고보 및 보성전문(고려대학교 전신) 이사장으로서 민족산업과 언론, 육영사업에 괄목한 만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또한, 로타리에도 열의를 가지고 있었고, 광복 후 한국 로타리를 재건할 당시에도 관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성로타리의 창립총회 장소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또, 스폰서클럽인 도쿄로타리가 초창기에 2~3개월에 한 번씩 회합을 가졌던 것과 같이 매주 주회를 열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회원들이 경향각지에 산재했던 것과 시대적 환경으로 인하여 주회가 정착하기까지는 시일이 걸렸을 것이다.

 

회합장소는 경성역 2층의 ‘그릴’ 레스토랑이었다. 당시 경성역은 시설과 규모 면에서 일본 도쿄역에 이어 동양에서 두 번째로 큰 역사였으며, 2층의 ‘그릴’은 주방 근무자가 40명에 이를 정도로 서양식 고급식당이었다. 1층 주방에서 2층으로 음식을 나르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초대회장으로 선임된 닛타 류지로가 조선철도의 고위임원이었으므로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했을 것으로 보인다.

 

<1925년 준공한 경성역(현 서울역) 역사. 2층 식당에서 로타리 회합을 가졌다.(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1922년 중앙고보 제1회 졸업식에서. 왼쪽부터 김성수 설립자, 최두선 전 교장, 송진우 동아일보 사장, 현상윤 교장. (사진 평전 인촌 김성수)>

 

경성에 이어서 부산과 평양, 대구에서 연속 창립

 

경성로타리는 1931년 창립 4년 만에 회원이 43명으로 증가했다. 또, 이듬해 8월에는 52명까지 확대되었는데, 이 가운데는 김연수(金秊洙), 박영철(朴榮喆), 방태영(方台榮), 민대식(閔大植), 유억겸(兪億兼), 박흥식(朴興植) 등 유력한 한국 회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외에 성명이 ‘S. Ryu’라고 기입되어 있는 회원도 한국인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한국로타리50년사 참조)

 

이런 가운데 1935년 3월 7일 부산로타리클럽이 18명의 회원으로 창립되었고, 5월 1일 국제로타리의 승인을 받았다.(등록번호 3802호) 이어서 국내 세 번째로 평양로타리클럽이 1937년 3월 17일 31명의 회원으로 창립되었다.(등록번호 4358호) 다음으로는 부산로타리클럽을 스폰서로 1938년 5월 18일 대구로타리클럽이 조직되었고 창립회원은 29명이었다.(등록번호 4751호)

 

이처럼 로타리가 활성화되자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일본과 한국, 만주국을 제70지구로 설정하였고, 제70구 로타리대회가 1938년 5월 14~15일 경성에서 열렸다.(조선일보, 1938. 5. 15)

 

<1938년 5월, 제70지구 로타리대회가 열렸던 조선호텔 모습.(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이 대회를 위해 3국의 회원 468명이 5월 13일부터 가족동반으로 경성에 도착,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에 투숙하였다고 한다. 제1일차 14일 오후 4시반부터는 조선호텔에서 간사회가 열려 각 클럽들이 제안한 일곱 가지 안건에 대해 협의하였다. 제2일차 오전에는 남산 조선신궁에 참배한 후 9시부터 부민관에서 본대회를 개최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하지만 역동적인 활동에 찬물을 끼얹는 사태가 일본 시즈오카에서 벌어졌다. 1940년 “기로에 서게 된 조선 로타리”라는 제하의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시즈오카로타리구락부에서 해산 선언이란 ‘폭탄적인’ 발표를 함으로써 경성로타리구락부를 비롯하여 부산, 대구, 평양 등 각 구락부 회원들에게 충격을 던져주었다고 보도하고 있다.(조선일보, 1940. 8. 11)

 

이에 언론에서 당시 경성로타리 회장 와다 야치호(和田八千穗, 한성병원장)에게 그 진위를 묻자 그는 ‘그것은 초문입니다’라고 로타리 해산 사실을 적극 부인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대동아공영이란 명분을 내세운 군국주의 일본이 바야흐로 전쟁으로 돌입한다는 신호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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