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3650 지구소개
Rotary International District 3650
한국로타리 3650지구, 100년 이야기 (6)
한국로타리 확대로 375지구(현 3650)에서
1969년 376지구(경상남⸱북도, 부산, 제주)→
1971년 377지구(전라남⸱북도)로 독립 발족해
글. 지구사료위원장 신흥래
(서울새신라RC, 소설가)
우리나라 지구(Distrit) 역사는 어떻게 흘러왔을까? 이번 호에서는 한국로타리의 ‘창세기’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그 뿌리서부터 되짚어본다.
우리나라 경성로타리클럽은 1938년 7월, 일제강점기의 일본과 만주국과 함께 신설된 국제로타리 제70지구 소속이었다. 이후 1939년 7월 70지구가 70, 71, 72지구 등 3개 지구로 분할되었고, 이 3개 지구가 자치(自治)지역으로 인정받는 연합회를 구성하게 된다.
이때 나고야, 동일본 등 20개 클럽으로 70지구를, 서일본과 대만 등 19개 클럽으로 71지구, 그리고 조선(경성, 부산, 대구, 평양 로타리클럽)의 4개 클럽, 만주의 3개 클럽 등으로 72지구로 나누게 된 것이다.
한국 4개 클럽, RI 70지구에서 72지구로 분할
제72지구의 초대총재로는 만주 대련로타리클럽의 카이세 킨고(貝瀨謹吾)가 지명되었다. 카이세 총재는 교토대를 나와 남만주철도, 대련기선 이사 등을 역임한 인물. 남만주철도주식회사란 실질적으로 만주에 거점을 둔 일본의 국책기업이었다. 1924년에는 대련시회 부의장에 당선된 바도 있다.
이렇게 3개 지구, 즉 우리나라를 포함해 일본과 만주 로타리를 아우르는 연합회장으로는 훗날 ‘일본 로타리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네야마 우메키치(米山梅吉, 1920년대 중반 RI이사 역임)가 선임됐다.
또한 3개 지구 회원들이 참가하는 제1회 지구연합 연차대회는 1940년 5월 5~6일 양일간 542명이 참석한 가운데 일본 요코야마 회관에서 열렸다.
그러나 1940년 12월, 일본 로타리들이 모두 해산하고 국제로타리에서 탈퇴했는데, 이는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으로 발화된 태평양전쟁을 대비한 조치였던 것이다. 우리도 이때 일본을 좇아 국제로타리를 탈퇴하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어 1940년 12월 31일부로 탈퇴하고 국제로타리에서는 1941년 2월 14일부로 등록을 취소했다. 이후 1949년 3월 29일, 그 역사를 계승한 서울로타리클럽을 재창립하고 RI 60지구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부산로타리가 1951년 11월, 대구로타리가 1953년 12월 재가입 신청을 하여 각각 국제로타리의 승인을 받았다.
1961년, 한국로타리연합회가 375지구로 독립
이후 국내 클럽이 9개 클럽으로 확대됨으로써 1959년 2월 한국로타리연합회가 결성되기에 이르고, 초대 연합회장으로 서울로타리의 김동성(金東成, 합동통신 사장)이 취임했다.
그리고 2년 뒤 국제로타리 이사회가 대한민국을 단독 지구로 승인하기에 이르렀고, ‘제375지구’라는 새로운 지구명칭을 부여했다. 375지구 발족과 함께 동대구로타리가 창립되어 당시 우리나라는 12개 클럽이었다.
초대총재로는 서울로타리의 이태환(李泰煥, 1904~1978)이 선임되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부친(이용혁)이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징역 6년형을 받았으나 상고심에서 풀려나 미국으로 망명하자 함께 도미해 미국에서 성장했고 퍼듀공대를 졸업했다. 광복 후 경성전기주식회사(지금의 한국전력 전신) 초대 사장을 맡았고, 뒤에 회장까지 역임한 바 있다.
또 이태환 총재는 서울로타리클럽 재승인과 한국로타리연합회 결성과정에서도 국제본부와 관련 실무를 담당하며 한국로타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우리가 독립지구로 승격할 무렵인 1961년 6월 국제로타리 조셉 A. 아베이 회장이 한국을 방문했고, 6월 12일에는 중앙청으로 장도영 내각수반을 예방하고 환담하기도 하였다.
<100년 6 소아재활원>
375지구 서울로타리클럽이 1962년부터 후원한 연세의료원 소아재활원과 부속국민학교.
<100년 6 자조주택>
375지구 상주로타리클럽이 1967년 한미재단과 함께 자조주택 10가구를 지어 무주택가정에 제공했다.
1969년 376지구, 1971년 377지구로 분할돼
로타리연합회 시대를 거쳐 한국로타리는 1961년 375지구로 독립한 한국로타리는 서서히 외연을 확장해 나갔다. 로타리클럽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회원수가 증가하자 1968년 국제로타리에 375지구 분할 신청서를 제출해 승인받았다. 이로써 1969년 7월 1일 375지구에서 376지구가 분할되어 독립지구가 되었다.
376지구는 경상남⸱북도, 부산, 제주도로 구성되었고 29개 클럽 1,052명의 회원 규모였다. 당시 375지구는 31개 클럽, 1,287명의 회원으로 남았다.
신설 376지구 초대총재는 부산로타리의 안성수(安星洙)가 선임되었다.
그런데 1970년 9월말 기준, 375지구는 클럽수가 31개클럽에서 59개클럽으로, 회원수는 1,287명에서 2,265명으로 확대되었다. 또, 연말까지 17개 클럽이 추가 창립될 예정이었으므로 또 하나의 지구가 발족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우리나라가 2개 지구가 된 지 2년 만의 경사였다.
1970넌 10월, 375지구 제10년차 지구대회에서 377지구 신설안을 결의하여 1971년 1월 국제로타리 이사회의 승인을 받았다. 이로써 1971년 2월 전라남⸱북도를 관할하는 377지구가 출범하고 초대총재에 광주로타리의 박동복(朴東福)을 선임했다.
박동복 초대총재는 금호전기주식회사 창업주로서 우리 3650지구 박영구 전총재(2010-11)의 선친이기도 하다.
이후 한국 로타리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면서 1995-96년 15개 지구가 되었다. 1995년 3월 기준, 총 860개클럽에 37,480명의 회원을 보유했다. 이는 회원수로서 세계 7위에 랭크되어 우리가 로타리 강국으로서 우뚝 서는 기록이었다. 그리하여 한국은 1995년 7월 1일부로 세계 34개 존(Zone) 가운데 존9으로서 단독 존(Zone) 시대를 개막하게 되었다.
특히 이 해에는 국제로타리 하버드 브라운 회장이 펼친 회원증강 캘러리 챌린지에서 한국의 3650지구가 최우수상을 수상함으로써 한국로타리의 위상을 한층 더 높이는 뜻깊은 해가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